편집자주 공연 칼럼니스트인 박병성이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뮤지컬 등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연극 '라이오스'. 국립극단 제공 최근 기후위기 논의 속에 인류세(Anthropocene)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인류가 지질에 뚜렷한 흔적을 남길 만큼 거대한 존재가 됐음을 뜻하는 이 용어는, 자연스럽게 인류 문명이 초래한 기후위기와 연결된다. 릴게임온라인 국립극단이 올해와 내년에 걸쳐 소개하는 독일 극작가 롤란트 쉼멜페니히의 '안트로폴리스' 5부작은 독일어로 인류세를 뜻하는 안트로포챈(Anthropozän)과 도시를 뜻하는 폴리스를 합친 말이다. 고대 도시 테베를 배경으로 디오니소스, 라이오스, 오이디푸스, 이오카스테, 안티고네 등 테베 왕족과 관련된 인물들의 이야기를 시간 순으로 들려준다. 네 편은 모두 바다이야기오락실 기존의 그리스 비극을 토대로 현대적으로 재번역한 작품이지만 두 번째 작품 '라이오스'만큼은 쉼멜페니히가 직접 창작했다. 그런 이유로 '라이오스'는 작가의 '안트로폴리스' 시리즈의 기획 의도와 그가 생각한 현대판 그리스 비극의 의미를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힌트가 된다. 오이디푸스의 아버지로 알려진 테베의 왕 라이오스가 주인공이다. 라이오스는 아들에게 죽임을 릴게임뜻 당하고 아내마저 빼앗긴다는 신탁을 듣는다. 아들이 태어나자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고, 살아남은 줄도 모르고 마주친 아들에게 살해당한다. 인과응보의 세계관이 지배하는 그리스 비극의 인물들은 오만하거나 불의한 행동으로 신의 저주를 받는다. 라이오스는 왜 신들의 미움을 사 끔찍한 신탁을 받게 된 것일까. 그 이유를 찾아가는 과정이 이 작품의 중심 야마토연타 서사다. 라이오스는 왕위를 잃고 쫓겨난 자신을 보살핀 펠롭스 왕의 아들 크리시포스를 유혹하고, 거부당하자 강제로 성관계를 맺는다. 이로 인해 크리시포스가 자살하고 분노한 펠롭스 왕은 신탁의 저주를 내린다. 연극 '라이오스' 바다이야기디시 신화로 되묻는 기술문명과 기후위기 연극 '라이오스'. 국립극단 제공 연극 '라이오스'는 일인극으로 진행된다. 객석 통로를 통해 등장한 배우 전혜진은 무대에 올라 라이오스, 왕비 이오테스카, 크리시포스, 테베의 관료 등 수십 개의 인물로 변신해 라이오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가 전하는 라이오스의 이야기는 명확하지 않다. 라이오스가 크리시포스를 사랑해서 함께 도망친 것이라고 했다가, 그저 강간한 것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라이오스가 신탁을 두려워하면서도 아이를 낳은 일에 대해서는 아예 네 가지 가정을 들어 아이를 낳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한다. 신화는 구전된 버전마다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실이 무엇이든 크리시포스에게 상처를 주었고, 결국 신탁을 실현할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연극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현대의 정치와 사회 풍자다. 라이오스가 태어나 보니 왕이었다고 거들먹거리는 장면에서는 타락한 재벌 2세의 모습이 스쳐가고, 왕을 옹립하기 위한 테베 관료들의 회의는 정쟁만 일삼고 논리 대신 고성만 오가는 지금의 정치판이 떠오른다. 손바닥에 '왕(王)' 자를 새긴 왕을 등장시키는 등 현실 정치 풍자로 객석의 웃음을 자아낸다. 현실 정치 비판을 넘어 작품이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것은 인류 문명에 대한 비판이다. 수수께끼를 내고 맞히지 못하면 살해했던 스핑크스는 끊임없이 날카로운 괴성을 내며 테베인들을 괴롭힌다. 궁극적으로 라이오스를 파멸로 이끈 것은 오이디푸스가 아니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스핑크스의 괴성이다. 작품에서 스핑크스는 기술문명을 상징한다. 스핑크스의 날개는 톱니바퀴로 이뤄져 있어 날카로운 기계음을 낸다. 라이오스 왕의 대관식에 터뜨린 폭죽의 잔해가 쓰레기처럼 떠도는 계단 무대는 폐허가 된 성전 또는 멸망한 인류 문명처럼 느껴진다. 라이오스의 죽음 장면에서 쏟아지는 녹색물은 자연 파괴로 인한 녹조를 연상시키며 기후위기의 징벌을 상징한다. 연극 '라이오스'는 그리스 비극의 인과응보 세계관을 통해 현재의 인류세와 관련된 자연 파괴와 기후위기에 대해 질문한다. 발전만을 바라보고 온 인류는 이제 답을 내려야 한다. 걸음걸이, 목소리, 표정을 수시로 바꾸며 다양한 인물로 변신하는 전혜진의 연기는 압도적이다. 라이오스 신화를 통해 현재 인류의 문명과 기후위기에 대해 질문하는 연극 '안트로폴리스Ⅱ 라이오스'는 22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한다.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