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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지현 ‘반전의 세계사’] 강제노동 vs 자유노동
일제 강점기 강제노역에 동원된 조선인의 애환을 그린 영화 ‘군함도’의 한 장면. [중앙포토]
국어사전에 따르면, ‘강제’는 권력이나 위력(威力)으로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시킨다는 뜻을 지닌다. ‘쿄오세(强制)’에 대한 일본어 사전의 정의도 다르지 않다. 적어도 사전적 정의에 관한 한, 한·일 간에 이견은 없다.
그런데 현실은 사전보다 훨씬 야마토연타 복잡하다. 일본제국의 총력전 체제에 동원된 식민지 조선인들의 강제노동 문제는 여전히 한·일 간 논란거리다. 일본군 위안부와 조선인 노무자는 자신의 의사에 반해 강제로 끌려갔기 때문에 강제노동이라는 한국 측의 주장과 ‘모집’ ‘관 알선’ ‘징용’에 의한 노무는 강제가 아니므로 강제노동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일본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바다이야기5만한국 정부가 2004년 제정한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은 강제 동원 피해자를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일제에 의하여 강제 동원되어 군인·군속·노무자·위안부 등의 생활을 강요당한 자’로 규정하고 있다. 반면 일본 정부는 전시 동원 체제하의 노무 동원을 범주적으로 강제노동에서 제외한다. 1930년 체결된 국제노동기구(ILO)의 강제노동조약(일본은 야마토릴게임 1932년 서명)을 근거로 강제성을 부정한다.
강제노동 국제 기준 100년 전과 달라져
대전 보라매공원에 설치된 강제징용노동자상. [중앙포토]
조선인 노동자의 강제노동에 관한 2021년 4월 1 릴게임손오공 6일 자 중의원 서면 질의에서 스가 총리가 ‘모집’ ‘관 알선’ ‘징용’에 의한 노무는 강제노동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답변한 것도 같은 논리이다. 강제노동 여부는 당시 통용된 국제법의 기준을 따라 판단해야 한다는 일본 정부의 시제법 논리가 반드시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하는 사람의 권리에 대한 오늘날의 국제적 기준이 거의 100년 야마토게임방법 전인 1930년과 같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문제다. 일제하 강제노동은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미래가 걸린 진행형의 과거이다. 미래가 된 과거라는 관점에서 볼 때, 납작한 사실을 넘어 강제노동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이다.
국제노동기구는 이미 1957년 전시 동원과 같은 예외 조항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정치적·경제적·징벌적 목적의 강제노동도 금지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 바 있다. 이로써 전시 동원이나 병역과 같은 예외 조항도 더는 강제노동의 낙인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설혹 일본 정부의 주장처럼 징용이 순전히 자발적 의사에 의한 것이라고 해도 강제노동이 아니라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인권적 감수성이 고양되고, 그에 따라 지구적 기억 문화에서 인권이 과거를 기억하고 판단하는 기준이 되면서 강제노동에 대한 국제적 감시와 제재는 더욱더 엄격해졌다. 현존 문서 중 완결판이라 할 수 있는 2014년 국제노동기구 강제노동협약 의정서는 전시동원체제와 같은 ‘강제노동’의 예외 조항을 완전히 삭제함으로써, 어떤 역사적 조건에서도 강제노동은 더는 발붙일 곳이 없어졌다.
2014년의 강제노동협약과는 별도로, 독일 의회는 이미 2000년 8월 12일 폴란드 등 동유럽에서 강제 동원한 노동자들, 강제수용소의 수용자들, 노역에 동원한 전쟁포로 등에 대한 배상법을 통과시킨 바 있다. 이 배상법에서 독일이 강제노동을 인정한 기준은 강제 연행 여부가 아니었다.
‘독일의 농장 노동자로 가자!’는 메시지가 담긴 폴란드 강제 노동자 모집 포스터. [중앙포토]
실제로 나치 점령 당시 폴란드 노동자들은 돈을 벌고 새로운 환경에서 출발하려는 의도에서 노동자로 등록하고 독일의 농촌이나 공장으로 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독일에 가서 더 나은 삶을 찾고 경제적 여유를 누리자는 식의 폴란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나치 선전 포스터들은 점령지 폴란드의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또 일부 젊은 여성들은 집안의 가부장적 억압에서 벗어나는 방편으로 독일행을 택하기도 했다. 베를린 등 독일 대도시의 영화관 앞에서 폴란드 노동자를 뜻하는 ‘P’자 표식을 외투에 붙이고 활짝 웃는 어린 여성 노동자의 사진은 강제노동의 복잡한 층위를 보여준다.
제3제국으로 일하러 가는 폴란드 여성들. [중앙포토]
심지어는 나치 박해를 피해 계약 노동자로 자원해서 독일로 간 폴란드 유대인들도 있었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나치 독일로 들어갔기 때문에 유대인이라는 의심에서 벗어났으며, 전후 무사히 폴란드로 귀환할 확률이 높았다.
2차 대전이 끝나자마자 큰 짐 가방을 들고 독일에서 귀국하는 노동자들을 노린 강도 살인이 폴란드 시골 역을 중심으로 빈번했는데, 가방을 가득 채운 독일제 고급 상품과 두둑한 현금을 노린 범죄였다. 이들이 돈벌이를 목적으로 나치 독일로의 이주 노동을 자원했고, 노상강도의 대상이 될 만큼 많은 돈을 벌어 왔다는 사실이 강제노동의 존재를 부인하는 증거는 아니다.
동유럽 강제노동자들에 대한 배상을 주관한 ‘기억·책임·미래 재단’은 합법적으로 체결된 계약이라 해도 노동자가 그 계약을 파기할 수 없다면 강제노동이라고 정의한다. 독일 정부의 입장도 같다. 이들이 강제노동의 피해자로 인정받은 것은 계약조건을 재협상하거나 계약을 파기하고 옮길 수 있는 이동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에 동원된 동유럽 노동자들은 강제로 독일로 끌려왔기 때문이 아니라 계약에서 이직과 거주 이전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했기 때문에 강제노동의 희생자로 배상받은 것이다. 이들에 대한 독일 정부의 배상은 2차 대전 이후 인권적 감수성의 확대와 더불어 국제노동기구의 강제노동에 대한 정의가 노동자 권익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온 큰 흐름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한국의 반일 민족주의자들이 분노하듯이, 영화 ‘군함도’의 광고 이미지처럼 ‘징용공’들이 강제 연행되어 노예 노동에 시달렸다고 과장해야만 강제노동의 성격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일본의 강제노동 부정론자들이 강변하듯이, 이들이 자유의사에 따른 계약 노동자로 도일했다고 해서 강제성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양측 모두 강제노동을 강제 동원의 문제로 환원시켜, 문제를 호도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도 외국인 노동자 인권 신경 써야 한·일 양국의 대립은 현재주의와 맥락주의의 충돌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 측이 주장하는 일제의 총력전 체제 노동 동원은 전시 동원을 강제노동의 예외 조항으로 둔 1930년의 강제노동조약을 중시하는 맥락주의 위에 서 있다. 맥락주의의 입장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미국의 노예제도나 식민주의 제노사이드 등도 당대의 역사적 맥락에서는 합법이었다는 식으로 정당화하는 문제가 있다.
반대로 한국 측의 입장은 2차 대전 이후 점차 고양된 일하는 사람의 인권에 대한 현재주의적 관점에서 총력전 체제에 동원된 징용 노동의 강제성을 부각한다. 2014년의 강제노동 수정 조약에 따르면, 총력전 체제의 노동 동원도 강제노동이라는 비판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또 과잉의 현재주의는 역사를 정치적으로 도구화할 위험성이 크다.
일본의 맥락주의와 한국의 현재주의가 팽팽하게 맞선 상황에서, 2007년 3월 5일 중의원 회의의 아베 총리 발언은 해석에 따라 뜻밖의 돌파구가 될 수도 있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협의의 강제성’은 부인하지만, 업자들에 의한 ‘광의의 강제성’은 인정한다는 그의 발언은 강제 동원은 아니지만, 강제노동은 인정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총리의 공식 발언이라는 점에서 한·일 양국의 최소공약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강제노동의 과거는 지금 여기에서 일하는 사람의 인권이라는 보편적인 기준에 서서 바라보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강제노동을 한·일 간의 민족적 감정싸움에서 구출해 일하는 사람들의 인권을 고양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야말로 동아시아의 전후 세대가 그들의 고통을 책임감 있게 기억하는 길이다. 지금 여기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강제노동의 그림자는 없는지 살펴보고, 그 관점에서 과거를 곱씹을 필요가 있다.
선진국을 자처하는 지금의 한국인들에게는 또다시 강제노동의 희생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보다 우리도 강제노동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이 더 절박하다. 성숙한 역사의식이 없는 선진국 타령은 공염불이다.
일제의 강제노동에는 그토록 분노하면서, 국제노동기구의 진일보된 2014년 강제노동협약을 아직도 비준하지 않고 있는 한국 정부의 역사관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임지현 서강대 석좌교수. 서강대에서 서양사 전공. 대표 저서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2021), 『기억 전쟁』(2019), 『대중 독재』(2004), 『우리 안의 파시즘』(공저 1999)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