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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옥천 지역잡지인 <월간 옥이네>가 100호 특집으로 독자들을 인터뷰했습니다. 더 많은 이야기는 <월간 옥이네> 10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편집자말>
[월간 옥이네]
▲ <월간 옥이네> 독자 천세민씨
ⓒ 월간 옥이네
천세민(21)씨는 <월간 옥이네>(아래 옥이네)를 '태도'로 읽는 사람이다. 매 호마다 밑줄을 긋고 태그를 붙이는 그의 습관은 옥이네가 지향해온 '천천히, 그러나 깊게'의 독자상을 닮아있다.
기자가 처음 그를 만난 건 2024년의 어느 여름날. 포도 한 상자를 들고 옥이네 사무실이 있는 충북 옥천 지역문화창작공간 '둠벙'에 찾아와, 잡지 한 권 한 권을 손에 쥐고 묻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당시 그는 서울대학교 사회복지학과 학생으로, 학내 자치언론인 <서울대저널> 기자로서 인터뷰를 위해 옥천을 찾았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그가 걸어온 삶의 경로와 일상, <서울대저널> 편집장으로서의 활동, 그리고 20대 독자로서 옥이네가 그의 저널리즘 지향에 미친 영향을 묻고 들었다. 옥이네 최연소 독자이자 열독자인 그가 전하는 옥이네의 의미를 정리해 담는다. 인터뷰는 9월 11일 서울대저널 편집실에서 진행됐다.
"서울 안의 시골"에서 배운 감각
천세민씨의 고향은 서울. 어린 시절 경기권에서 3~4년 정도를 살았지만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중에서도 그의 고향은 관악구다. 고시촌 일대 낮은 집세 덕에 각기 다른 사연의 다양한 사람이 모여드는 동네. "서울 안의 시골"이라는 표현이 친구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돌곤 했다. 종로나 강남 같은 서울의 전형적 풍경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삶의 조건이 다채롭게 섞인 곳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은, 흔히 떠올리는 '대도시 학교'와는 완전히 달랐다. 관악구 삼성초등학교를 다녔는데 한 학급에 18명, 학년 당 세 반이 전부였다. 학생 수가 적어 전교생이 서로의 얼굴을 알고 지냈다. 운동장에 직접 벼를 심고 농민들과 함께 타작해 인절미를 만들어 먹었으며, 학교 텃밭에서 기른 쌈채소가 급식으로 올라오는 학교였다. 선생님이 구워준 군고구마를 먹으며 연극을 올렸고, 친구들과는 놀면서 배웠다.
중학교에 가서는 성격대로 "벌이고 나서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영화 제작 동아리를 직접 만들고 예술동아리 활동을 하며 다양한 시도를 했다. 학생회장을 맡고, PC방에서 게임 대회를 열기도 했다. 하고 싶은 것은 원없이 다해보던 시기였다.
그런 그의 일상에 지역아동센터는 늘 함께였다. 코로나19 이전까지 꾸준히 다녔는데, 또래 친구들 대부분 형편이 어려웠다. 하지만 그것은 결핍이 아니라 일상의 일부였다.
고등학교에 들어서며 리듬은 급격히 달라졌다. 코로나19가 터지면서 수업은 모두 온라인으로 전환됐고, 친구들과의 만남도 끊겼다. 첫 수학시험에서 50점을 받았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 바로 학원에 등록했어요. 학교는 온라인 수업이었고, 저는 아침마다 학원 자습실로 출근해 밤까지 앉아있었죠."
대학에 입학했을 때 또 다른 충격이 찾아왔다.
"대학에 와보니 다들 너무 잘 사는 거예요. 사회문제를 이야기해도 '그들의 문제를 돕자'는 식이었죠. 그런데 저에겐 '우리의 문제'였거든요."
그는 사회복지학을 전공으로 택했다. 사회과학 안에서도 가장 현실과 맞닿아 있고 제도와 법에 직접 연관된 학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와보니 기대와는 달랐다.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학생들의 경우 같은 대학에 행정학과가 없어 그 차선으로 이곳을 선택한 경우가 많았고, 진로 역시 현장보다는 연구자·로스쿨·행정고시로 향했다. 전공을 '직업'으로 삼으려는 분위기는 약했다. 무엇보다 사회복지학이 예상보다 보수적이라는 점에서 실망도 컸다. '탈성장'이나 '에코페미니즘'처럼 생활 양식의 전환을 이야기할 때, 복지제도가 오히려 걸림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복지를 제도의 안정적 재생산 장치로 보는 시각이 강하잖아요. 제가 하고 싶은 공부와는 양립하기 어렵다는 고민이 들었죠."
그는 사회복지사라는 직업적 꿈보다는,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지금은 인류학·여성학·환경 등 공부의 스펙트럼을 넓히며 자신에게 맞는 학문적 자리를 모색하는 중이다.
기록의 문법을 배운 곳, 잡지와 신문
▲ 천세민씨가 <월간 옥이네>를 읽으며 부착한 인덱스 스티커
ⓒ 월간 옥이네
어릴 적부터 그는 종이의 질감을 사랑했다. <개똥이네 놀이터>, <고래가 그랬어> 같은 어린이 잡지부터 <우등생 논술>, <우등생 퀴즈>, <과학동아> 같은 학습잡지까지, 집에 늘 쌓여있던 잡지 덕분일지도 모른다. 부모님이 꾸준히 구독해보던 신문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쳤다. 중학교 무렵부터는 신문 기사 자체의 '문법'에 끌렸다. 거대한 사건을 신속하게 요약하고, 최소한의 테두리라도 확실히 보여주는 능력.
고등학교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신문 스크랩에 빠진다. 코로나19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 덕이다.
"하루 대부분 집에 있어야 하는 때였잖아요. 시간은 남고 심심하기도 했거든요(웃음). 좋은 문장, 좋은 기사를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그의 취향은 뚜렷했다. 단순 사실 보도보다 이면을 끝까지 파고드는 기사. <한겨레> 이문영 기자, <시사인> 장일호 기자의 글을 탐독했다.
"단지 사실을 나열하는 게 아니라 끝까지 추적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을 기사로 접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그게 나와 무관한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처럼 와닿았죠."
대학에 입학해서는 <서울대저널>을 만나며 본격적으로 기록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1학년 때 환경동아리 '씨알'에서 함께 활동했던 선배의 추천으로 독자편집위원을 맡은 게 시작이었다. 그렇게 이후 자연스레 기자가 됐다.
"저널은 격월간이다 보니 속보는 온라인 스트레이트(기사)로 처리해요. 대신 지면 기사는 사건의 이면을 집요하게 따라가려고 노력하죠."
올해 7월부터는 편집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좋아하던 기사 문법을 이제 직접 실험하고, 동료들과 함께 만들어 가는 자리다.
광장 이후를 어떻게 쓸 것인가
한국 사회가 대혼란에 빠졌던 지난해 12월 계엄 선포와 올해 초 탄핵 정국. 이 속에서 저널의 시간표도 국가 일정과 동기화됐다. 누군가는 국회 앞으로, 누군가는 성명서 초안으로, 누군가는 광장의 확성기 앞과 뒤로 향했다. 깊은 밤 온라인 공유 문서로 문장을 주고받고, 새벽 4~5시에 성명서를 내기도 했다. 긴급 총운영위원회가 열리면 수백 명이 몰린 줌 회의를 참관하고 기록했다. 그렇게 방학 내내 '편집실-광장-편집실'을 오가는 일상이 반복됐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 분노와 절망을 그 역시 느꼈지만 현장을 바삐 오가며, 희망과 가능성도 충분히 만날 수 있었다.
"절망은 잠깐이었어요. 사람들이 바뀌는 게 보였거든요. 더 바쁘게 움직이면, 조금이라도 더 바뀔 수 있겠다 싶었죠. 비록 그것이 지금 우리의 시간과 몸과 마음을 다 투자해야 하는 일일지라도요."
당시 학내 총회장에는 '지성의 전당', '지식인' 같은 수사가 넘쳐났다. 그곳에서 그는 '계엄 이전에도 달라지지 않았던 삶-노동자·여성·성소수자·비수도권 청년'을 호명하지 않는 공론의 빈틈을 봤다. 지금 이 사태를 만든 건 '계엄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 민주주의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기득권의 그방식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윤석열 선배는 나가라"는 식의 학내 분위기도 힘들게 느껴졌다.
그래서 저널은 방향을 틀었다. 대규모 총회만이 아니라 작은 공론장의 목소리를 수집했다. 외부의 비난과 내부의 자의식 사이에서 '우리-아님'의 복잡한 감정을 드러내는 학생 집담회를 찾고 기록했다.
그 과정에서 진행한 인터뷰만 30~40개. 학교 밖 청소년, 부당해고 노동자, 성폭력 생존자, "나는 이대남이었다"는 자기고백까지, 다양한 결의 삶을 인터뷰를 통해 만나고 배웠다.
"듣고 나면, 그게 끝이 아니라 시작이더라고요. 첫 보도 이후 '그 문제가 더 이상 그 사람의 삶을 압도하지 않을 때까지' 따라가는 게, 들은 사람의 책임이라는 걸 배웠어요. 그런 이야기가 내 안에 쌓이다 보니, 예전처럼 살지는 못하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우리는 변하고 있고, 변할 수 있다는 희망도 만났어요. 그래서 계속 그 이야기들을 연결할 수밖에 없겠다 싶어요."
혹서의 광장과 좁은 편집실에서 몇 달을 살다시피 한 끝에 남은 건 성장.
"스트레이트 기사는 이제 입력-출력이 바로 붙어요(웃음). 기술이 늘었고, 무엇보다 '다음'을 쓰는 법을 배웠죠."
옥이네와의 인연 : "단어 하나, 사진 한 장의 태도"
▲ <월간 옥이네> 독자 천세민씨의 노트북
ⓒ 월간 옥이네
서울대저널 활동을 시작하며, 세민씨는 지면 언론의 무게를 실감했다. 단지 온라인 기사로 빠르게 속보를 내는 것과 달리, 지면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기사 구성·디자인·표현 하나하나가 모두 고민의 대상이 됐다. 어떤 어휘를 쓰고 어떤 이미지를 배치할지까지, 매 순간 선택이 쌓여야 완성되는 게 잡지였다.
그래서 그는 여러 기성 언론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시사인>, < 한겨레21 >의 속도감 있는 기획과 분석, '프리즘오브', '보스토크 매거진'의 문화·예술적 감각... 그 가운데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처음 마주한 낯선 월간지 한 권이 있었다. 바로 옥이네였다.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알고리즘이 보여준 옥이네 지면 이미지는 곧장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어떤 잡지일까?' 궁금해 바로 주문했고, 첫 호를 받아 펼쳐든 순간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무엇보다 그에게 꽂힌 것은 '태도'였다.
"일단 작은 지역의 이야기를 이렇게 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새로웠어요. 농촌 공동체를 가까이서 밀착하는 태도가 지면 너머에서 느껴지기도 했고요. 그게 뭔지 궁금했고 구체적으로 묻고 싶기도 했어요. 옥이네를 저희 저널이 배울 하나의 모델로 살펴보면 좋겠다 싶어 인터뷰를 요청하기도 했었고요."
그가 옥이네 지면을 통해, 인터뷰를 통해 배운 것을 구체적으로 꼽았다. ▲ 동물 관련 기사에서 '마리' 대신 '목숨 명(命)' 표기 ▲ 어린이와 청소년을 성인과 동등하게 '씨'로 호칭 ▲ '지역소멸' 대신 '지역위기'라는 표현을 쓰는 언어 감각 ▲ 사진 지면에서 어린이·청소년·노인을 고르게 배치하려는 시도 ▲ 재난 보도에서 날것의 이미지나 참사 당시 사진을 지양하는 태도 등.
"동물권 단체가 아무리 제안해도 언론에 실제로 반영된 경우는 많지 않거든요. 그런데 옥이네는 그런 선택을 당연하게 하고 있었어요. 모든 언론이 반드시 따라야 할 '정답'은 아닐 수 있어요. 하지만 저희 저널도 속도가 느린 언론이고, 우리가 단순 사실 전달에 그치지 않고 어떤 관점으로 보도할지를 고민한다면, 이렇게 단어와 문장 하나하나를 어떻게 쓸지가 정말 중요하다고 느꼈어요."
이런 태도는 그의 취재 방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마을이나 공동체 기사를 쓸 때, 대표자나 운영진만이 아니라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한다는 옥이네의 원칙이 기억에 남았어요. 저널도 학생사회의 중심 회의나 총회만이 아니라, 학생·소수자인권위원회 오픈마이크 같은 작은 공론장의 목소리를 담아야 한다는 고민으로 이어졌습니다."
그가 좋아하는 옥이네 기사는 동네 생활 기반을 다룬 기획이다. 목욕탕·세탁소·수선집처럼 한 동네에 하나쯤 있지만 사라져가는 공간을 기록한 호.
"관악구 대학동 마지막 대중목욕탕도 결국 사라졌거든요. 그게 정말 아쉬워요. 그래서 저는 여행을 가면 꼭 그 동네 목욕탕을 들러요. 안부를 묻듯, 예전 추억을 꺼내놓듯요."
최근 가장 강하게 읽은 호는 경북 의성 산불 이후 공동체 특집이다.
"이렇게 큰 사건을 옥이네를 통해 상세히 알았다는 게 충격이었죠. 서울에서 이런 사고가 발생했다면 상상도 못할 정도로 난리가 났겠죠. 더 놀라웠던 건 '서로를 돕는 모임'에서 시작해 주민 스스로 조직을 세워 가는 서사였어요. 여성들의 돌봄 역량을 강조하는 문장이 오해되지 않게 쓰려는 신중함도 느껴졌고요."
'읍면자치'가 보여준 로드맵
세민씨는 옥이네의 '읍면자치' 연재를 몇 번이고 읽으며 밑줄을 그었다. 그는 이 연재를 '광장 이후의 매뉴얼'이라 부른다. 계엄 사태와 대선을 지나며 <서울대저널>도 민주주의 특집호를 꾸렸지만, 한계를 느꼈다. 군대 내부의 민주주의, 극우 세력 분석, 광장의 다양한 목소리 기록까지는 가능했지만 "이 목소리를 일상으로 어떻게 가져올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선 막막했다.
"대선이 끝나고 나니, 광장에서 했던 이야기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어요. 이후가 없으면 정말 소용이 없겠다 싶었죠. 그런데 옥이네에서 읍면자치라는 걸 꾸준히 다루고 있었고, 그 안에 구체적인 사례가 있다는 걸 보며 놀랐어요."
물론 읍면자치라는 생소한 개념을 처음부터 이해하기 쉬웠던 건 아니다. 하지만 일본 정촌자치의 구체적 장면, 영국 패리시 의회 사례, 한국의 제도 개선을 둘러싼 다양한 경로가 이어지는 과정을 따라가며 이 어려운 연재를 계속 붙잡게 된다고 했다.
"결국 메시지는 하나잖아요. 핵심은 지자체장이나 행정이 아닌 주민이라는 것. '주민이 자기 일상을 민주적으로 다룰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게 자치'라는 걸 반복해서 상기시켜줬죠. 그런 면에서 '광장 이후'를 고민하는 지금의 우리에게 무척 중요한 키워드라는 생각이 들어요."
옥이네 읍면자치 기획은 광장과 일상 사이 간극을 메우는 '방법론' 같기도 했다.
"광장의 언어를 일상에 번역하는 방법을 옥이네에서 본 거죠.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에서 그대로 적용하긴 어렵지만, 주민자치회·청년 모임·지역아동센터 같은 단위로 치환할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그게 저한테는 가능성의 로드맵이었어요."
20대 독자의 자리
▲ 천세민씨가 활동하는 <서울대저널> 작업실 내부의 화이트보드
ⓒ 월간 옥이네
옥이네는 주 독자층이 중장년층이지만, 그는 "20대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강조한다. 특히 귀농·귀촌, 로컬 산업, 세대 교차 의제는 이미 20대의 생활과도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동네 카페 아르바이트, 청년 주거 문제, 지방 소도시 청년들의 귀촌 경험 같은 건 사실 제 또래 친구들이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주제예요. 옥이네는 이걸 지역 노인·청소년·장애인의 이야기와 나란히 놓아요. 세대의 스펙트럼을 이렇게 넓게 담는 매체가 또 있을까요."
그는 20대 독자로서 옥이네를 읽을 때 중요한 건 "모든 꼭지를 다 이해하거나 다 즐길 필요가 없다는 점"이라고 덧붙였다.
"모든 기사가 다 재미있을 순 없어요. 골라 읽고, 다시 돌아와서 읽는 독서가 가능하다는 게 장점이에요. 오히려 그래서 더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것 같아요."
<서울대저널>은 올해 창간 30주년을 맞았다. 학내에 남은 유일한 보도 매체다. 재정은 동문 광고와 후원, 그리고 소액의 자치언론기금이 전부다. 취재비와 인쇄비에 대부분을 쓰고, 기자들에게 활동비는 없다. 더 어려운 건 사람 문제다. 학업과 병행하기 힘들어 중도에 떠나는 기자가 적지 않다.
하지만 그는 "이 어려움 속에서도 조직은 살아남는다"고 말했다. 이번 학기만 해도 21명(기자·PD·디자이너·교육부장·수습)이 활동한다. 지난 1년 동안 지면 로고와 내지를 전면 개정하고, 온라인 스트레이트 보도를 강화하고, SNS 운영 방식을 바꿔서 새로운 독자층을 확보했다.
"로고 하나 바꾸는 데 한 달을 토론했어요. 언론의 지향을 시각으로 새기고 싶었거든요. 그 과정 자체가 팀워크를 강화시켰어요."
마치 '에너자이저' 같은 일상이다. 그의 동력은 무엇일까.
"동력은 결국 사람이에요. 주제의 칸막이를 넘어 '어디서든 최전선에 서 보자'고 말하는 동료들. 강의실에선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이 저널에는 있어요. 같이 밥 먹고, 놀고, 싸우고, 학습하고, 쓰고 싶어서 힘들어도 남아있습니다."
옥이네 100호에 부치는 말
세민 씨는 '100호'라는 숫자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권수의 누적이 아니라, 매 호마다 쌓여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만들어 낸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그에게도 옥이네는 그냥 잡지가 아니다.
"사람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가 깊숙이 담겨 있잖아요. 옥이네는 단순히 잡지가 아니라, 옥천이라는 지역 내부의 사정을 비추면서 동시에 지역이 중앙정부나 다른 공동체·단체들과 어떻게 연결되고 확장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장이더라고요. 그래서 저한테는 잡지라기보다 아카이브에 가까워요. 구술을 듣고 기록을 남기는, 그게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서울에 살고 있는 자신에게 옥이네는 추상적인 지역을 '구체적인 얼굴'로 기억하게 해주는 매체라고도 했다.
"지역이라는 게 먼 곳의 뉴스처럼 스쳐 지나가는 게 아니라, 옥천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고, 무언가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돼요. '서마학(서울대학교 내 마르크스 경제학 개설을 요구하는 학생들) 투쟁'을 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있듯이, 옥천에도 (마르크스 등의 철학을 전하는) 고병권 선생님 강의를 듣거나 기후정의행진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구체적으로 기억하게 됐습니다. 그런 기록을 계속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월간 옥이네 통권 100호(2025년 10월호)글·사진 박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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