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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한상엽


김 작가는 슬럼프에 빠졌다. 거짓말처럼 머릿속에 어떤 장면도 떠오르질 않았다. “아이디어가 바닥났군.” 멍하니 창밖 은하계를 바라보던 김은 개인 우주선에 탑승해 ‘그 가게’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문장 스토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깔끔한 양복을 차려입은 사내가 김을 맞이했다. 김은 다소 긴장한 채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둘러봤다. 어둡고 차갑게 빛나는 홀 내부에는 박물관처럼 뭔가가 잔뜩 전시돼 있었다. 김은 본능적으로 그것들을 둘러보기 시작했고, 놀란 얼굴로 가리켰다. “이게 뭡니까?” “저희가 판매하는 문장(sentence)입니다.” 매대 위에는 여러 개의 문장이 홀로그램처럼 허공에 떠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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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한다고요? 정확히 어떤 개념이죠?” “구매를 결정하시면, 그 순간 이 문장의 주인이 되는 겁니다.” “내가 이 문장의 주인이 되면, 다른 사람들은 이 문장을 못 쓴다는 겁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문장의 주인은 그 문장이 사용된 드라마틱한 순간을 목격할 수 있는 독점적 권리를 갖습니다. 당신은 인류 역사상 그 문장이 사용동양증권어플
된 모든 순간을 관측할 수 있게 됩니다. 먼 과거부터 전 지구의 시공간까지 뛰어넘어서요.”
곰곰이 생각하던 김은 다시 물었다. “제가 만약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라는 문장을 구매하면, 이순신 장군님께서 돌아가신 그 순간을 직접 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저희 스토어에 그 문장이 있다면, 그리고 장군님이 정확히 그렇게 말씀하셨다휴비스 주식
면 가능합니다.” 김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슬럼프에서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문장 하나만 잘 구매하면 온갖 영감의 순간을 보게 될 수 있으리라. “아무거나 고를 수 있다는 거죠?”
김은 홀을 누비며 전시된 문장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폈다. 장르를 넘나들며 상상력을 자극하는 문장이 너무 많았다. ‘언젠가는 너도 손오션
가락이 잘릴 날이 올 거다.’ ‘지금 사랑한다는 말을 꺼내지 않으면 심장이 터져버릴 거예요.’ ‘내가 침대 밑에서 뭘 찾았게?’ ‘문을 닫아! 그가 돌아오기 전에!’ 매력적인 문장이 너무 많았다. 이제 곧 저 문장을 실제로 쓴 상황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인가. “원하신다면 샘플을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문장 가까이 얼굴을 대시죠.” 김은 ‘어젯밤에 뭐 했모의주식
어?’란 문장 앞에 바짝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러자 마치 그 공간으로 이동한 것처럼 눈앞에 드라마틱한 순간이 펼쳐졌다.
“어젯밤에 뭐 했어?” “몇 번 말해, 피곤해서 그냥 일찍 잤다니까?” “그냥 일찍 잤는데 왜 당신 속옷이 거기서 나오냐고!” 날 선 감정으로 팽팽한 부부 싸움의 현장이 펼쳐졌다. 파국을 향하는 스토리,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전율이었다. 고개를 든 김은 옆의 다른 문장을 들여다보았다. ‘문을 닫아! 그가 돌아오기 전에!’라는 문장이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산장의 급박한 순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빌어먹을! 눈보라 때문에 문이 부서져서 완전히 안 닫혀!” “우린 다 죽을 거야!” 패닉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은 그 어떤 영화에서도 본 적이 없던 다큐멘터리 그 자체였다. 몹시 만족한 김은 이후로도 여러 문장을 둘러봤고, 생생하게 펼쳐지는 운명적 순간을 목격했다. 이미 머릿속에 온갖 소설이 탄생하고 있었다. 단 한 장면의 샘플만으로도 이럴진대, 그 문장의 주인이 된다면 얼마나 대단할까?
“고르셨습니까?” “조금만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죄송하지만 허락된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김은 빠르게 문장 사이를 돌아다녔다. 뭘 골라야 할까? 어떤 문장이 가장 드라마가 많을까? ‘예수님 핑계 대지 마!’ ‘지금 당장 결정해. 나야 얘야?’ ‘거긴 절대 밟아선 안 돼’ ‘아무도 믿지 마. 가족조차도’…. 김은 가장 자극적인 문장을 좇았다. 단 한 줄만으로 소설이 완성될 수 있는 그런 문장.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운명이 뒤틀리는 순간일 수밖에 없는 문장. 지나가던 그 누구라도 듣자마자 멈춰 설 수밖에 없는 문장.
이윽고 드디어 김은 찾아냈다. ‘제발 살려줘.’ 바로 이거였다. 가장 단순하고 가장 강렬한 문장. 역사상 이 말이 사용된 모든 순간을 볼 수 있다면, 김은 인류가 경험한 모든 비극을 써낼 자신이 있었다. “이걸로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사내는 김이 가리킨 문장의 빛을 김에게 전송했다. “이제 이 문장의 주인은 당신입니다.” 김은 벅찬 가슴팍을 열어 문장을 받아들였다.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설렘이 가득했다. 아직 가격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문장의 주인이 된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그 문장을 내뱉는 드라마틱한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드라마의 일부가 되는 것이죠. 그게 문장의 대가(代價)입니다.” 사내는 곧 사라졌고, 가게에 진열돼 있던 다른 문장도 연기처럼 종적을 감췄다. 김은 자신이 고른 다섯 글자를 되새기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픽션입니다.